[칼럼] 이건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한겨레신문 2008.6.3)
김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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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4 12:00
1980년 봄 용산역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군에 입대할 때 얘기다. 인솔자인 현역병의 첫마디가 “어이 신병, 희망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였다. 이 말이 신병에게 주는 위안이라기보다는 현역병 자신에게 던지는 위안임을 안 것은, 졸병 생활에 익숙해진 한참 뒤였다. 지금도 인터넷에는 ‘MB 퇴임시계’가 재깍재깍 돌아가고 있다고 한다. 지난 몇 달이 오죽 답답했으면 그러할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제대 날짜 손꼽아 기다리던 그 옛날 졸병 때 일들이 떠올랐다.
오늘은 이명박 정부 출범 100일째 되는 날이다. 그렇지만 싹수가 노래서인지 지지율은 20%대로 곤두박질쳤다. ‘미친 소는 너나 먹어’라며 10대 청소년들이 시작한 촛불시위가 한 달째 이어지고, 지난 토요일에는 시내 곳곳에 “이명박은 물러가라”는 구호가 울려퍼졌다. 시청 앞 광장과 찻길을 가득 메운 10만 군중이 촛불을 흔들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며 헌법 제1조를 노래 불렀고, 수만 시위대가 밤새 청와대 진입을 시도하며 경찰과 공방전을 벌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날부터 따져서 아직 채 반년이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이명박 정부의 무능과 무지, 독선과 오만, 거듭된 거짓말 때문이다. 우리 국민은 87년 6월 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의 공안 통치를 끝장낸 역사적 경험과 자부심이 있다. 더구나 지난 20년 동안 국민의 삶 속에 민주주의가 일상화되면서, 이제는 누구도 과거의 공안통치 시절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국민을 섬기는 정부’가 되겠다고 했다. 그러나 쇠고기 협상 과정에서 국민의 먹을거리 안전과 검역주권을 내팽개쳤다. 항의하는 국민에게는 ‘안 먹으면 될 것 아니냐’는 막말이 돌아왔다. 중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이명박 대통령이 ‘1만명의 촛불은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했는지 보고하라’며 버럭 화를 냈다는 보도가 있자, 촛불집회에는 ‘내 돈으로 촛불 샀다, 배후는 양초공장!’이라는 피켓까지 등장했다.
이 대통령이 당선되기까지 ‘경제 살리기’ 공약은 큰 구실을 했다. 그렇지만 물가는 치솟고 서민들 삶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매년 60만개씩 늘리겠다던 일자리는 어느새 20만개로 줄었고, 고용의 질은 더 나빠지고 있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는 한반도 대운하 건설, 대기업과 부자들 세금 인하, 공기업 민영화와 인원 감축 등 서민 경제 살리기와 동떨어진 엉뚱한 정책들만 내놓고 있다.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대운하 건설에 왜 저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한물간 공기업 민영화 정책을 왜 하필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추진하려는 것일까.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명박 정부 100일 동안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멀어져 갔다. “자고 일어나면 또 무슨 짓을 벌였을지 불안해서 못 살겠다. 하는 일마다 사고만 친다”는 주부들의 발언도 이어진다. 도대체 대한민국 보수들은 실력이 이것밖에 안 되나. 아니면 대통령의 리더십이 문제인가. 보수냐 진보냐를 떠나, 국민이 불안해서 못 살겠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잃어버린 10년이 빚어낸 공백이 예상보다 훨씬 크고 깊다’는 변명도 들린다. 그렇지만 건국 이래 50년 동안 집권 경험이 없었던 국민의 정부도, 외환위기와 실업대란 속에서도 이 모양 이 꼴로 나라를 운영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지난 10년 동안 부동산 투기나 하며 지낸 강부자 정부라지만, 이건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