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선 어머니 5주기] “전태일의 어머니이자, 민중의 어머니, 이소선 정신 배워 위기 극복하자”: 매일노동뉴스(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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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어머니 5주기] “전태일의 어머니이자, 민중의 어머니, 이소선 정신 배워 위기 극복하자”: 매일노동뉴스(08.29)

구도희 4,861 2016.08.29 08:36
 
 
2011년 9월3일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자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생애를 살았던 이소선 여사가 영면했다. 노동계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를 잃었다”며 슬퍼했다. 세월은 화살처럼 빨랐다. 사회는 격변했다. 그새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 끝을 향하고 있고, 양대 노총 위원장도 바뀌었다. 역시 임기 말이 됐다. 세월호 참사로 생때같은 아이들 250명을 포함해 304명이 희생됐다. 민중총궐기대회에서 물대포를 맞은 백남기 농민이 사경을 헤매고 있고,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은 도로교통법 등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고용노동부가 2대 지침을 발표하면서 한국노총이 참여해 명맥을 유지하던 사회적 대화는 그야말로 소실됐다.
 
워낙 강한 정권의 압박 때문일까. 살아생전 이소선 어머니가 “뭉쳐야 산다. 그래야 이긴다”고 말했듯 양대 노총 사이의 거리는 매우 가까워졌다. 이소선 어머니 5주기를 앞두고 <매일노동뉴스>가 '이소선 어머니 삶과 정신'을 주제로 연 특별대담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나왔다. 노동계 원로인 이원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과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이 이소선 어머니의 삶을 되돌아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대담은 사회자 없이 진행됐다. 두 원로는 "양대 노총뿐만 아니라 미조직 비정규 노동자·이주노동자·특수고용 노동자·중소 영세노동자·소상공인이 하나가 돼 싸우는 게 이소선 어머니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한목소리를 냈다. 특별대담은 지난 23일 오전 서울 서교동 <매일노동뉴스> 회의실에서 진행됐다.
 
 
이소선 어머니 5주기, 노동운동 무엇을 할 것인가
 
이수호 이사장 : 전태일재단에서는 올해 이소선 어머니 5주기를 맞아 어머니를 기리고 어머니의 생각을 구체화해 실행하는 사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먼저 어머니의 삶을 돌아보자는 의미에서 토론회를 배치했습니다. 30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토론회를 합니다. 이원보 이사장도 그날 발제를 하겠지만 지금 후배들이 열심히 토론을 준비하고 있는데요. 전태일의 어머니로서의 이소선 여사와 노동운동가로서, 시민사회 운동가로서,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어머니의 역할을 새롭게 정리하게 돼 기쁩니다.
 
그동안 재단은 추모행사와 전태일 정신을 기리는 문학상·노동상을 중심으로 사업을 해 왔습니다. 여기에 전태일이 여공들에게 나눴던 풀빵 사랑을 되새기는 의미에서 풀빵나눔 사회활동가 지원사업도 하고 있어요. 올해 어머니 5주기와 관련해서는 미술계에서 특별기획전을 준비 중이고 이소선 합창단 공연까지 풍성하게 준비해 어머니의 정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지려 합니다.
 
이원보 이사장 : 이소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시간이 금방 지나간 것 같아요. 돌아가신 뒤 그만큼 노동계에 사건이 많았다는 것이고, 노동자들이 어려웠다는 뜻이죠. 이번 토론회를 준비하면서 우린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 생각해 봤습니다. 어머니에 비하면 우린 한 일이 없어 송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운동이 어머니에게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요.
 
30일 토론회에서는 어머니의 삶이 노동운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운동가로서 이소선 어머니는 운동에 어떤 족적을 남겼는지 다룰 생각입니다. 전태일 어머니로, 네 남매의 어머니로, 청계피복노조의 대부로, 노동운동가로, 사회운동가로서의 삶을 사셨죠. 운동 영역을 점점 넓혀 온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아들의 유언을 따르는 데 몰두하다 점점 활동 반경이 넓어졌어요. 1970년대 중반쯤 오면 노동운동으로 확대되고, 80년대 들어서는 노동에 기반을 둔 전체 노동운동·사회운동으로 활동을 넓혔습니다.
 
이수호 : 저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이소선 어머니를 알았습니다. 90년대 초반 제가 감옥에 있을 때 저를 낳아 주신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노동운동 언저리에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집회에서 어머니를 뵙게 됐어요.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렸죠. 이후 전교조 임원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찾아뵙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워지기 시작하고 명절에 우리 애들도 데리고 가서 인사드리고 지냈어요. 특히 제가 전태일과 나이가 같은 인연으로 어머니도 아들처럼 대해 주셨어요.
 
어머니는 집회장에서 늘 강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한 가지 말씀을 시작하면 끝까지 하고 시원하게 욕도 하시던 분이죠.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나약해 보이는 한 여인이자 어머니였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운명처럼 제가 전태일재단을 맡게 됐습니다. 재단에서 어머님이 보여 주신 모습과 남겨 주신 말들, 전태일 정신을 우리 시대에 맞게 정리하려고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재단에서 같이 일하는 일꾼도 늘었고요. 이제 전태일 열사 50주기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50주기 때 뭔가 크게 해 보자는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노동운동 위기, 이소선 어머니 푯대 삼아 넘자
 
이원보 : 어머니가 돌아가신 2011년은 이명박 정권 후기였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 수위를 높여 가던 시기였죠.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가족들이 연이어 안타까운 목숨을 내던졌어요. 운동이 끝을 모를 만큼 나락으로 떨어지는 참담한 상황이었습니다.
 
뒤이어 들어선 박근혜 정권은 경제 살리기를 내세워 자기가 공약했던 경제민주화, 사회양극화 해소 같은 시대적 의제를 팽개치고 자본을 위해 노동자들의 저항을 무너뜨리는 데 몰두했습니다. 노동개악으로 해고를 쉽게 하고, 노동유연화를 확대하고, 임금을 적게 주면서 노사관계를 정부가 좌지우지하려 합니다. 한편으론 과감하게 노조를 깨면서 한쪽으로는 정교하게 국민과 노동자, 노동자와 노동자를 분리합니다. 좀 낫다고 하는 조직노동은 파업권이 보장돼 있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죠. 현장이 경쟁논리로 쪼개져 파업 자체가 어렵고 손해배상과 가압류로 숨통을 막아 버리니 한계가 있습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정치적으로 대응하려 하면 기득권, 정치파업이라고 막아 버리고. 비정규 노동자들은 조직이 어려우니 적극적으로 싸울 수가 없죠. 목소리를 내야 하니까 고공농성 등 위험한 행동을 하고 그도 어려우니까 자결하는 등 극단적 방법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파업건수가 적어 노사관계가 안정된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중소·영세기업이나 비정규 노동자들의 집단적 투쟁이 굉장히 늘었습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양대 노총의 공조가 급격히 증가했다는 겁니다. 서로 방문하고 격려하고 항의성명을 공동으로 내고, 토론회도 열고. 새로운 현상입니다. 공공부문이나 제조업부문에서 연대와 공동투쟁 사례가 늘었어요. 긍정적으로 봅니다. 또한 희망버스나 손잡고처럼 시민사회운동과의 결합도 많아졌습니다. 아직도 조직률이 낮지만 조합원 숫자는 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전체 운동을 주도하는 건 아니에요. 운동의 양상을 확 바꾼 것 같지도 않고요. 부분적 연대를 축적하면서 변화를 모색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5주기에 이소선 어머니께 무엇을 자랑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이런 긍정적인 변화의 양상이 작지만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는 것 아닐까요. 남은 과제는 변화를 끌어내는 것이겠죠.
 
이수호 : 어머니가 돌아가신 2011년부터 현재까지 노동운동은 큰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항상 어려움은 있었지만 박근혜 정권의 집요한 탄압은 노동운동에 큰 타격을 줬죠. 노동운동이나 노조 자체를 불인정하는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전교조와 공무원노조의 노동기본권을 박탈했습니다. 단체협약을 무시하고 시행령이나 지침으로 일방적으로 억압하는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습니다. 노동운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그럼에도 내면에 흐르는 노동운동의 정신과 구체적 실천들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노동운동의 중심, 기댈 언덕, 바라볼 푯대가 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해요. 그 역할을 전태일 열사와 이소선 어머니가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는 거죠. 이소선 어머니 5주기를 계기로 노동운동 전체를 돌아보고 전망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현대사의 아픔을 응축한 이소선의 삶
 
이수호 : 어머니는 가난한 가운데 네 남매를 키우면서 숱한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젊은 시절엔 근로정신대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했고. 역사적 어려움을 온전히 감당하셨죠. 전태일도 자기 혼자 현장에서 각성하고 배운 게 있었겠지만, 어머니께 배운 교훈도 많았을 거예요. 아버지도 대구지역에서 노동운동에 몸담은 적이 있습니다.
 
이원보 : 어머니는 1929년에 태어나셨습니다. 현대사에서 서민들이 겪은 애환·괴로움·고통·시련 전체를 응축해 낸 삶이 아닌가 싶어요. (이소선 어머니의) 아버지는 항일운동을 하시다 어머니가 4살 되던 해에 학살당하셨고. 시대적 비극을 다 겪었었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뿔뿔이 흩어져 이산가족이 됐다가 또다시 만나고, 일제 강점기에서 한국전쟁을 지나 참상을 온몸으로 부딪혔습니다. 이렇게 고생한 분이 또 있을까 싶네요.
 
이수호 : 전태일은 스스로 분신해 항거했지만 그 당시에는 그 길밖에 없었을 겁니다. 꽉 막혀 있는 노동운동에 돌파구를 마련한 거죠. 돌아가시면서 본인이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달라는 부탁을 하고 어머니의 다짐을 받고 떠났죠. 저는 그 부분도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원보 : 아들의 몸이 불타고 죽어 가는 것을 보고도 아들의 유언을 또렷이 기억한다는 것은 보통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정신을 놓을 것 같은데. 아들이 분신했다는 얘기를 듣고도 정신을 차리기 위해 택시를 보내고 버스를 타서 생각했다고 하잖아요. 그런 자제력과 냉정함은 오랜 가난과 고통 속에서 다져진 생활철학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저는 이것도 노동운동가·대중운동가에게 굉장히 필요한 덕목이라고 봐요. 즉자적 대응이 아니라 한발 물러서서 대응책을 강구하라는 것도 어머니의 가르침이죠.
 
전태일의 장례를 치르기 전에 정부기관에서 돈을 준다는 회유를 일체 거부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정말 하기 힘든 일입니다. 협박과 회유가 있었는데 가난뱅이 엄마가 그걸 뿌리친다?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어머니의 총명함과 삶의 지혜가 이후 청계피복노조에서 시작된 활동에서 고스란히 발현됐습니다.
 
이수호 : 어머니는 청렴·총명·센스·순발력·헌신·겸손을 모두 갖추셨죠. 초기 노동운동이 어렵던 시기에 청계피복노조를 중심으로 활동하시다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운동 과정에서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유가족들과의 만남을 시작하시고 이후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운동에 헌신하셨습니다. 비슷한 처지인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조직을 만들어 함께했지요.
 
이원보 : 기본에 충실했고, 원칙에 어긋나는 건 일절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자주성을 지켜 나가는 데 단호한 모습을 보이셨어요. 노조 운영 과정에서 의견을 모아 가는 리더십도 대단했습니다.
 
이수호 : 그렇죠.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가고 가장 아픈 부분을 끌어안고 같이 공감하고 위로해 주는 역할을 하셨습니다. 연세가 많이 드셔서 당신 건강도 안 좋으셨는데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 하면 만사를 제치고 우선 달려가셨죠. 첫 마음을 그대로 유지하는 모습이 저희들에게 큰 울림으로 남아 있어요.
 
 
양대 노총, 같은 노동운동 원칙 향해 가야
 
이수호 : 이소선 어머니는 전태일의 어머니로 출발했지만 이를 뛰어넘어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 그리고 사회 전체의 어머니로 거듭나셨어요. 모든 민중의 어머니로 사셨고 우리 마음속에 늘 그런 분이 계시다는 게 우리의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어머니의 정신을 우리가 잘 이어받아서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하는데…. 이소선 어머니가 모든 걸 행동으로 보여 주셨지만 특히나 강조한 건 “한국노총·민주노총·정규직·비정규직 모든 노동자가 하나 돼라”는 말씀이잖아요. 어머니의 가르침을 어떻게 구현해 나갈 수 있을까요.
 
이원보 : 어머니는 철학이나 세계관처럼 "하나 돼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죠. 청계피복노조 활동을 통해 체득한 것으로 추측돼요. 노조활동을 해 보니 분열되면 안 되더라, 하나로 뭉치니 이기더라, 이런 경험을 오랫동안 뼈저리게 하신 거죠.
 
이수호 : 무조건 하나로 해라, 큰 게 좋다는 의미는 당연히 아니고요. 노동운동의 원칙을 확인하고 같은 원칙을 향해 하나로 가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사실 "크게 하나 되자"는 노조의 기본 원칙이죠. 배제 없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말을 곱씹어 봐야 합니다.
 
이원보 : 옛날에는 전태일 열사 추모제에서 양대 노총 사이도 그렇고 청계피복노조 내부에서도 분란이 벌어지고 했는데, 지금은 너무 자연스럽게 결합하고 연대도 하잖아요. 지금의 연대와 공동투쟁으로 오기까지 어머니의 역할이 컸다고 봐요.
 
이수호 : 어머니의 뜻과 정신을 기리는 노력이 자연스럽게 제조부문과 공공부문 등 투쟁 사안에 따라 함께하는 운동으로까지 발전했습니다. 그 근거를 만들어 준 게 어머니이신 것 같아요. 노동운동의 현실과 어머니의 말씀과 관련해서 노동운동이 어떻게 그런 정신을 수용하고 어떻게 체화하면 좋을지 말씀해 주세요.
 
이원보 : 요즘도 노동운동 안팎에서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물으면 저도 갑갑합니다. 오랫동안 침체돼 있다 보니 사기가 꺾인 것일 수도 있어요. 감히 뭔가를 내놓기 어려운 상태죠. 먼저 노동자들의 기를 살려야 한다고 봐요. 기를 살리려면 자주 모여야 해요. 분산되고 고립돼 있으면 힘이 날 수가 없습니다. 모임·만남은 서로 어깨를 기대고 마주 보고 용기 얻고 힘을 얻는 행위거든요.
 
비정규직·특수고용 노동자·영세 중소기업 노동자를 포함해 전체 노동자를 아우르는 고민과 실천을 해야 합니다. 산별노조 운동이라든가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든가. 지금은 큰 고민이 너무 뒤로 밀려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본적인 고민인데도 현실에서 잘 실행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말이죠. 총파업도 중요하기만 중장기적인 전략을 고민할 필요가 있어요.
 
요즘에는 노조가 교육 같은 일상활동에 소홀한 것 같아요. 현장 간부들은 조합원들이 변했다, 예전 같지 않다고 하는데 조합원이 바뀌었으면 노조 집행부 활동도 바뀌어야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원칙에 충실한 노조운동을 강구해야 합니다. 아무리 탄압이 들어오고 노동 관련 제도가 개악되더라도 총파업 동력은 결국 일상활동에서 판가름 나기 때문입니다.
 
이수호 : 원칙과 기본에 충실한 것이 가장 힘 있고 대중적인 것이지요. 어려울 때일수록 그래야 합니다. 노동운동의 기본과 원칙이 전태일과 이소선 어머니, 그 속에 다 녹아 있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어려울 때, 힘겨울 때일수록 이소선·전태일 동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노동자들과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시죠.
 
 
1년에 최소한 두 번은 함께 모이자
 
이원보 : 어머니에게는 운동가·활동가의 자세와 철학·품성이 다 담겨 있어요. 전태일은 전태일 사상으로 승화됐는데, 어머니도 정신을 기릴 충분한 조건을 갖췄다고 생각해요. 어머니 전기가 후배들한테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생각해야 합니다. 어머니의 “하나가 돼라”는 말씀과 관련해 어떤 방법으로 하나가 될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양대 노총이 연대한다고 해서 갑자기 하나가 되지는 않을 거란 말이죠. 하나가 되는 과정과 원칙은 어때야 하는지, 양대 노총뿐만 아니라 미조직 노동자·이주노동자·특수고용 노동자·중소영세 노동자는 어떻게 하나로 만들어 나갈지 함께 방안을 강구해야 합니다.
 
이수호 : 어머니가 간곡하게 당부하신 말씀이죠. 30일 토론회에서 집중적으로 토론하면 구체적인 방안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소선 어머니 정신을 이어 나가고자 한다면 최소한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노동자대회’와 ‘세계 노동절’ 이렇게 1년에 두 번이라도 양대 노총과 미조직 비정규 노동자, 소상공인까지 모여서 기념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토론회에서 구체화되면 양대 노총에 제안할 생각이에요. 각자 다른 자리에서 싸우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확실히 노동계 전체가 탄압받고 있기 때문에 요구조건도 같아요. 전태일과 어머니의 당부를 생각한다면 같은 목소리로 요구를 하는 것에서 출발하자는 생각이 듭니다.
 
이원보 : 양대 노총의 요구조건이 비슷하고 공동투쟁도 하지만 일상적 연대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전태일 정신이나 사상, 어머니의 치열했던 삶이 노동운동에 살아 숨 쉴 수 있고 노동자들이 희망을 갖고 열심히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과정에서 재단이 할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양대 노총이 서로 폭넓고 강하게 연대하도록 재단이 중간에서 역할을 잘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수호 :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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